아버지 죄송합니다.그리고 존경하고 사랑 합니다.

2020. 6. 15. 02:48나그네의 미국생활/엄마의 무거운 침묵

내 생에의 기둥이 셨던 내 아버지

8년 전에 엄마를 미국으로 모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홀로 남은 엄마가 걱정이 되어 미국에서 나랑 함께 살자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단호히 거절하셨고 

더 이상 설득을 못한 나는 엄마를 여동생에게 맡겨두고 돌아왔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나는 밤에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전화벨이 울릴 때면 가슴부터 방망이 질이며, 생활을 하면서도 온갖 신경은 고향 부모님께 향해 있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긴장감과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아버지에 대한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화를 통해 듣게 되었고,

병원에 계시던 아버지를 뵙고 작지만 안도의 쉼을 갖었었다

위 전체를 들어내신 아버지는 상상하고 염려했던 것보다 좋아 보였다.

그렇게 되기까지 큰 남동생이 고생이 많았다는 걸 알았다.

동생은 직장을 멈추고 서울 병원에서 함께 거주하며 지극정성으로 간병을 했었다.

78세 아버지의 보이는 상태는 동생 그런 수고의 결과라는 것을 알았을 때 동생보다도 올케한테 참으로 고마웠다.

"내 피 같은 동기간들",

이런 동기간들을 위해 아까울 것이  있겠는가, 싶었다.

다른 어떤 형제들보다 부모님을 향한 마음들이 있으니 고마웠고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 후 2여 년 만에 아버지는 암 재발이라는 선고를 받았고.

서울 큰 병원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항암치료를 하시던 아버지는 급기야 

 백혈구 수치가 급속하게 감소되면서 간병하던 여동생과 함께 무균실에  겪리 되기를 몇차레 드나들며

 두 부녀는 그렇게  지옥 같은 그 여름을 보내고 일반 병실로 나오셨다.

상황의 심각성을 전화로만 듣던 나는 아버지께 영양 있는 식사와  운동을 요구했고  

모든 것이 귀찮으신 아버지는  늘 한결같은 말씀으로 "알았다 귀찮으니 그만 끊자"라는 말씀만 하셨다.

길어진 아버지의 병원생활이 걱정되어 병원을 방문했을 때, 나는 절망을 보았다.

앙상하게 막대기 같이 마른 몸과   머리카락을 밀어버린 모습은 내 아버지모습이 아니였다.

이렇게  낯선 중환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나는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버지 죄송해요, 라고 외치며 울었다 

억장이 무너진 그 순간에 본능에서 나오는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아무것도 드시는 것이 없이 주사하나 달고 누워 계셨다.

모르핀이었다.

아버지는 그 외에 어떤 것도 거절하신다.

간호사가 주사를 가져오면 확인 후 더 이상 처치를 못하게 하시며

" 다 끝나 가는데 새로 시작하지 말라" 호통을 치시곤  하시었다.

더 이상의 치료를 중단시킨 상태로 마지막을 기다리시는 아버를 뵈며 

이런 일이 내게도 닥치는가

아버지 없는 세상이 나도 맞게 되는가. 

나도 부모님이 없는 시간이 올 수 있다는 걸  그때에야 생각하게 되었다.

담당의사는 아무것도 드리지 말라고 하신다.

무엇이라도  먹게 되면 고통의 시간만 길어지신단다.

당시 아버지한테 의사가 절대적인 사람이어서 나는 의사의 말대로 입안만 닦아 드릴뿐 아무것도 해 드리지을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한이 될 결정과 행동을 했던 것이다.

나는 의사의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 자식으로 생각을 먼저 했어야 했다.

그 어려운 시절에 우리 오남매를 낳아 기르시며 버겁다 하지 않으시고 이만큼 길러주신 아버지께

존경과 감사를,속죄와 사랑을 준비했어야 했다.

그리고 말을 했어야 했다 

고마웠다고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말을 했어야 했다.

그동안 해 드리지 못했던 한 끼 죽이라도 정성껏 만들어 아버지입에 넣어 드리면서,

은혜에 보답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을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처럼 

살아가면서 "한"이라는 단어를 품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리고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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