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의 요양 시설을 생각했다

2020. 6. 18. 23:51나그네의 미국생활/엄마의 무거운 침묵

엄마의 마음은 이미 한국에 가 있다.

날마다 한국으로 보내 달라 조르던 엄마는 드디어 옷들도 싸 두었다.

사워 후 몸을 감싸던 대형 타월이 좋으셨는지 

당신이 쓰시던 타월을 함께 넣으셨다.

"엄마, 쓰던 수건을 왜 가져가려고 그래, 짐만 되는데 "

"내가 쓰던 거니까"

엄마한테 이해를 시키기 위해 나의 생각을 설명을 했다.

그리고 나는 엄마를 보내기 싫다고,,,

앞으로 끝까지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려고 엄마를 모시고 왔다고 했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떠 있던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아니 포기하는 듯했다.

그러나 엄마는 한국 정서에 그리움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집에서 두 시간 거리에 한인들이 있는 요양시설이 있다

낮에 노인들을 모시고가 온종일 식사와 간식을 주기도 하고 시간에 맞춰 특별한 

운동과 배움의 시간들이 있지만 

날마다 그곳까지 출퇴근은 어려울 것 같았다.

아예 입소까지 생각하여 엄마한테 설명을 했다 

엄마는 그곳이라도 보내 달란다.

귀가 어두워 듣기가 쉽지 않아도 사람들의 모임으로 가시고 싶어 하신다,

그 길을 알아보던 중 

엄마는 다시 한국행을 요구하신다. 어차피 시설로 가려면 한국에 시설에 가 계시겠단다

"내가 죽으면 너 혼자 여기서 어떻게 할래

그래도 한국엔 4남매 자식들이 있어 여기보다는 낳으니 

나를 한국으로 보내 주라, "  한국 가면 시설로 가겠노라, " 하시는 엄마의 말을 듣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이 감출 수가 없었다. 

아직도 내가 가슴을 치는 것은 왜 그때 내가 직장을 그만두지 못했던가, 이다

만약에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엄마와 도란도란 24시간을 함께 했더라면

엄마는 한국행을 고집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디든지 함께 가고 무엇이든지 만들어 먹고 

함께 웃고 

예기하고, 했더라면

지금 이런 후회도 그리움도 아쉬움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기회가 있었지만 욕심 때문에,

그놈의 돈 때문에, 

그리고 자식 때문에, 

평생 죄인 되어 가슴앓이를 한다.

엄마와 아래층에서 함께 자던 나는 

바닥에 자는 것이 너무 불편해 침대를 찾아 2층으로 가서 잤다,

물론 엄마는 약 6개월 계셨으니 별 문제없으리라 생각을 했다.

낮은 침대에 화장실도 방에 있고 조명등도 켜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아침에 출근 준비를 위해 내려오니 

화장실 욕실에 대단히 토해 놓은 것 

깜짝 놀라서 물었더니 "저녁 먹은 것이 문제가 된 나보다" 고 하신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만약에 홀로 무슨 급한 상황이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난다.

그래도 직장을 그만 두지 못한 나는 미친년이었다.

주변을 대충 정리하고 그런 엄마를 홀로 두고 출근을 했다.

온종일 일이 손에 잡혔겠는가,?

빨리 집에 오고 싶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엄마를 살폈다.

이상은 없는 것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가 스트레스를 받은 것 아닌가 싶다.

아파트에 비해 없는 단독 주택에서 아래층에 혼자만 있으니,

무섭기도 하고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요구가 없으신 엄마는 여기서 함께 자자라고 말을 하지 않으신 것,  

이 또한 씻기지 않을 가슴앓이로 남아있다.

여전히 2층으로 자러 가려는데  말문을 떼신다 

"여기서 같이 자자."

지금 생각해 보면 미숙한 자식이다.

엄마의 마음을 읽지 못해 엄마를 편하게 해 드리지 못한 미숙한 딸이었다.

그런 나에게 호통이라도 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출가한 자녀에게 독립적인 삶을 강하게 실천하시던 엄마는 

출가한 자녀들에게 간섭과 훈수를 두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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