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1. 18:26ㆍ나그네의 미국생활/일상 생활속에 이모저모
미국의 대부분의 주 공교육 기관의 신학기가 주로 9월 초을 전후해서 시작이 됩니다. 제가 미국으로 이주해 올 때 한국의 여름방학을 이용해 왔고, 초등학교 3학년과 5학년생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9월에 시작되는 신학기에 학교로 전입을 시켜야 했습니다.
어렵게 얻었어도 운전면허를 손에 넣었고 차를 샀기 때문에 몸은 자유로워 졌지만 언어의 장벽은 높기만 했습니다. 준비된 질문을 하기는 쉽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기란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수첩과 펜을 가지고 다니며 그들 앞에 들이밀었습니다. " 미안하지만 난 아직 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여기에 써 줄래?" 나는 행운이 있었던지 그동안 만난 사람들은 너무나 신사적이고 친절했습니다.
약한 자들을 위해서는 한 없이 너그러운 미국인들의 특성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은 도와줄 수 있어 기쁘다는 얼굴로 부탁하는 저에게 친절하게 써줍니다. 나는 다시 요구합니다. "미안하지만 정자로 써 줄래?" 필기체로 흘겨쓰는 문장을 알아보기란 쉽지않앗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찮다는 내색 없이 정자로 써 줍니다. 이것이 그 당시 미국인들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기독교 정신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의 친절을 받으며 나는 어떠했는가?. 애기때부터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사람으로 마음에 이런 선한사마리아 인의 마음이 있었던가, 나의 스스로를 돌아보았답니다)
자세히 보기 ☞ 미국에서 좌충우돌하며 운전면허 시험보기.
1. 나는 미국의 여러 시스탬도 몰랐고, 한인들이 많지 않은 곳이어서 도움을 받을 곳도 없었지만, 그보다 특별한 욕심이 있어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결해 나가자 하는 생각으로 목사님의 도움을 거절했고,
- 또 다른 욕심은 그렇게 부딛치면서 영어로 말하기와 듣기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 미 본토인들의 일반 생각을 읽고 일 처리해 가는 방식을 배울 기회를 얻고 싶었고
- 또 미국의 시스탬을 몸소 체험해 보고 싶은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맨땅에 머리박기 지만 직접 추진해 나가다 보면 뭔가는 건질 수 있을 것이다" 생각했었습니다. ( 이와 같은 성격을 좋게 말하면 도전정신이고, 다르게 말하면 무모한 행동이 겠지만, 그것은 여행을 하면서도 시도하는 저의 장점이자 또 단점입니다,)
2. 나는 어짜피 외국에서 왔고 영어로 말 못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들에 대해 담대하게 대처하기로 했습니다.
3. 한국에서 오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등록시킬때 무엇이 필요한지 몰라서 땔 수 있는 서류는 모두 다 준비를 했고, 종류별로 따로 파일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그 모든 파일이 든 가방을 들고 다녔습니다.
- 신분증에 관한것은 시댁 쪽으로나 친정 쪽 선대로부터 땔 수 있는 등, 초본을 다 준비를 했고
- 우리 부부의 신분증과 경력증명서 학교 졸업장 성적증명서까지 준비를 했고
- 아이들을 위해서는 학교 재적증명서와 건강검진결과서 육아수첩과 예방접종 기록까지, 원본 2부씩 준비를 했고 전부 번역본을 만들어 공증까지 받아 파일을 만들었습니다.
4.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해 온 서류들 덕에 스스로 해처나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던지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싶답니다. (철저한 준비성의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 자세히 보기 ☞ 은퇴가 없는 미국직장, 나는 언제 은퇴 해야 하나?
5. 아이들을 학교에 등록을 시키기 위해 서류 가방을 들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로 찾아갔습니다. 아직은 영어가 안되는 아이들을 집에 두고 혼자 찾아간 학교에서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이유는 학교에서 직접 서류 접수를 받아 아이들을 받는 것이 아니라 관할 지방 교육청으로 가야 했습니다. ( 여기서 저는 미국의 교육부 행정 시스템을 일부 알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기 ☞ 하루의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할까요?
5. 역시 시스템을 알지 못해 생긴 실수였습니다. 학교에서 친절하게 약도를 그려주며 알려 줬지만 여전히 알아 듣지 못하는 언어는 나에게 더 이상 장벽이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코리안 아줌마이기 때문입니다. (영어를 할수가 있었다면 전화한통으로 시행착오가 없었을 수 있었겠지만 발로 직접 뛰며 배우게 되는 것은 잊혀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6. 당시는 네비게이션도 없었고 스마트폰도 없었습니다. 학교 직원이 그려준 그림이 있었지만 이해하기 힘들어서 집에와서 인터넷으로 지도를 확인하고 종이위에 쓰고 손으로 그렸습니다. (당시엔 집에 프린터가 없었습니다). 한 손에 지도가 그려진 종이를 들고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며 찾아간 교육청은 집에서 120킬로로 달리는 고속도로를 약 40분가량 달려가서 있었습니다.
7. 또 다시 부딪치는 언어의 장벽. 나는 또 메모지와 펜을 그들 앞에 들이밀었습니다. 그리고 발음이 안좋아 한마디 하는것도 그들이 알아 듣지를 못하니 나도 메모를 통해 질문을 했고 그들의 요구를 메모를 통해 대화를 했습니다. (여기서 강하게 배운것은 발음기호의 악센트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악센트가 들어가는 위치가 달라지면 그들은 알아 듣지 못합니다.)
8. 아이들의 서류파일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서류를 찾아 제출하고서 아이들은 집 근처가 아닌 ESL 클래스가 있는 조금 먼 학교에 배정이 되었습니다. 외국인들이 많지 않은 지역이라 ESL클래스가 있는 학교가 드물었습니다.
자세히 보기 ☞ 미국 초기 정착기 중에 은행 계좌 열기 에피소드?
9. 마지막 스스로 저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은 교육청에서 일을 봐 주시던 직원들은 나의 서류가방을 보며 대단히 놀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철저한 준비로 두 번 방문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의 준비에, 주위의 모든 직원들이 들여다 보며 한 마디씩 하는 것을 보며 속으로 그들에게 말을 했답니다. "알겠니? 이것이 코리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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