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는 누구이며 유명해 지게 된 이유는?

2022. 12. 9. 16:05지식인/문학과 문화,인물

모나리자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유명한 예술 작품에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작품을 보는 감각은 없지만 그 작품을 보기 위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보니 인산인해의 사람들로 작품을 보기가 쉽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보고자 햇던 그 작품은 모나리자로 유명한 La Gioconda라는 이름의 여성 반신 초상화였으며 생각보다 크지도 않은 작품은 그림에 맞는 프레임에 쌓여 한쪽 측면 벽 중앙에 단독으로 붙어 있었습니다. 

 

그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던 터라 책을 통해 정보를 습득해 갔었지만 그 작품이 왜 그리 유명하게 되었는지 궁금증이 더 생겼으며,  엷은 미소가 머문것 같은 얼굴에 신비로운 눈빛이 작품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이지만 그것은 누구나 취할 수 있는 표정이 아니던가 싶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된 모나리자는 실존 인물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이 유명하게 된 것은 작품을 그린 작가의 유명세도 있지만 그림에 덧입힌 기법이 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모나리자를 그린 작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를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 년에 이태리에서 태어나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화가이자, 건축가, 발명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아들의 학습능력을 일찍 알아차린 아버지에 의해  읽기, 쓰기, 기본 수학 등을 배웠으며 15세 때 조각가이자 화가인 Andrea del Verrocchio에게 수습생으로 보내 졌습니다.

20세에 그의 재능이 빛을 내기 시작했지만 10년을 더 교육을 받았고 1499년 프랑스가 밀라노를 침공했을때 피렌체에서 초상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1503년에서 1506년 사이 그려진 그림이 모나리자로 추정되며 그림은 21인치 x 31인치의 유화입니다.

다빈치는 수년간 이탈리아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프란시스 1세왕에 의해  최고의 화가이자 건축가 칭호를 제안받고 프랑스로 떠난 후 3년 만에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생플로랑탱 궁전 교회 근처에 묻혔습니다.


다빈치가 죽고 난후 그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프란체스코 멜지는 다빈치의 모든 유산을 물려받았고 사후 결혼까지 하면서 

이후 그녀의 아들이 다빈치의 모든 재산을 팔았습니다. 

 

 



 모나리자는 누구?

 


프랑스 프랑수아 1 세왕의 소유가 되었던  모나리자의 모델이 누구였는지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플로렌스의 부유한 비단 상인의 세 번째 아내 리사 게라르디니(Lisa Gherardini)라고 추측하며 비단 상인이 새집에 걸어둘 준비로 아내의 초상화를 의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빈치가 프랑스로 떠날때 게라르디니에게 그림을 주지 않고 가지고 떠났으므로 

일부에서는 다빈치의 자화상이나 상상 속의 여인 또는 이상형의 여인을 그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빈치 역시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그림의 출처나 여성의 신원을 밝히지 않으며 어떤 시각적 단서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 상상력은 꼬리를 물게 됩니다

 

 "모나리자"라는  '나의 여인'을 의미 하는 이탈리아어 'mona'( ma donna의 줄임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모나리자가 유명하게 된 이유 

 

예술적 기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의 눈에는 매우 단순해 보이는 한 장의 초상화 그림에 불과하지만 

현재 프랑스 소유로 루브르 박물관에 영구소장된 모나리자는 방탄유리 속에서 보호받으며 매년 수백만명의 박문객을 불러 모읍니다. 

16세기 초부터 예술 애호가, 역사가, 음모론자, 관광객들을 사로잡았던 이 작품은 3/4 포즈의 반신 초상화로 윤곽선을 부드럽고 현실감있게 생생한 효과를 내는 스푸마토( sfumato ) 기법으로 그려졌으며 모델에 대한 미스터리를 고조시키는 가상 배경 또한 독특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스푸마토( sfumato )기법이란  당시  당시 예술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기법과는 다르게  이탈리아어로 '사라지다' 또는 '증발하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색과 색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지 않게 그리는 기법으로  완성하면서 모나리자를 빛, 배경과 혼합하고 테두리를 포함한 모든 것을 혼합했습니다. 그의 붓칠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여 그림의 베일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빛이 곡면에 떨어지는 방식에 매료되어 모나리자의 머리카락에 여러 겹의 투명한 색상을 만들고 머리에 쓰고 있는 얇은 베일을 만들어 모나리자의 얼굴을 빛나게 했습니다.

 

모나리자는, 그가 죽던 1519년까지 그의 작업실에 남아 있다가, 그 후 프란시스 1세의 왕실 소장품이 되었고 나중에 프랑스 혁명가들에 의해 회수되어,  잠시 동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침실에  걸려 있다가 루브르 박물관에 영구 전시되었습니다. 

한 전문가는 이 그림이 유명하게 된 까닭은 보는이 들이  그녀와 감정적으로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모델에 대한 미스터리가 그녀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모나리자 강도 사건때문일 것입니다.

1911년  미스터리한 강도 사건으로 세간의 이목을 끄었고 경찰 수사로 이어지며 전 세계 신문에 광범위하게 보도되면서 모나리자는 빠르게 대중의 의식 가운데로 부상했습니다.

관람객들은 파리의 '치욕의 표식'이 되는 벽의 빈공간으로 몰려들었으며 유명한 입체파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와 월스트리트의 거물 JP 모건이 용의자로 모두 조사를 받았습니다,  

 

 

 


모나리자 그림의 가치

 


예술작품은 돈으로 환산할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의자에 앉아 있는 평범한 여성, 그리고 매우 차분하고 신비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기 위해 셀 수 없는 사람들이 해마다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합니다.

 

프랑스는 단순히 박물관의 입장료만이 아니라 그녀를 보기위해 모여든 방문자들이 먹고 쓰고 사고 자는 모든 경비를 계산할 것입니다.

 

일부 미술 전문가들은그림 경매는 7억 달러 이상의 가격을 말하지만 현재 인플레이션을 고려할 때 그 가치는 8억 5천만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그림은 1962년에 1억 달러에 보험에 가입되었으며, 이는 오늘날의 8억 7천만 달러에 해당합니다.

현대 일부 전문가들은 500억 달러 정도를 추정하지만 실제로 는 모나리자가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이 귀중한 예술 작품을 팔 수 없는 귀중한 보물로 간주하고 팔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다른 작품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를 구입해 2020년부터 전시를 시작했습니다.

 

 


  

 

 


 도둑 손에 넘어간 모나리자

 

1911년, 모나리자는 빈센조 페루지아라는 루브르 박물관 직원에 의해 도난당했습니다. 페루지아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이 그림을 이탈리아로 반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11년까지 크게 주목을 받지 않던 모나리자를 두 명의 박물관 직원인 공범의 도움으로 작업복 속에 감춰서 나왔으며 24시간 동안 이 그림이 사라진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범인은 이 그림을 자신의 아파트에 2년을 보관했다가 피렌체의 한 화랑에 팔려고 시도 하다가 적발이 되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에 반환되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에는 박물관에서 기물 파손의 대상이 되어 피해를 입었으며 지금은

현대 기술 덕분에 기후가 조절되는 환경의 방탄유리로 보호를 받고 잇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 내각 회의가 열렸고 루브르 박물관의 회화 감독이 사임했습니다.

 

모나리자가 자리를 비운 2년 후 그녀가 자리로 돌아오자 이전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모여들어 처음 이틀 동안에만 루브르 박물관에서 10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녀를 관람했습니다.

 

 

 

 

미국을 방문한 모나리자


1963년, 미국 캐네디 대통령 영부인 재키여사의 부탁으로 모나리자를 워싱턴 DC의 국립 미술관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대여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예술 전문가들과 프랑스 대중들로부터 많은 유려와 항의가 이어졌고,  대서양 횡단하는 과정에 그림에 대한 위험이 크다는 걱정에 시선이 쏠렸습니다. 

그러나 온도조절케이스와 내화성 방수 용기를 맞춤으로 제작되었고 원양 정기선 초 호화 개인실에 모셔진 모나리자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여행을 했습니다. 경비원과 박물관 관계자들의 철통 같은 감시와 보호가 24시간 이루어졌으며 무사히 미국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전시 개막식때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이 그림은 자유의 여신상에 이어 프랑스 국민이 미국에 보낸 세컨드 레이디(Second Lady)다.라고 말하며 크게 감사했습니다.

불과 3주 만에  500,000명이 방문했으며 나중에 뉴욕시에서는 백만 명이 모나리자를 보기위해 방문했습니다.

불행하게도 현재는 모나리자가 앞으로 어떤 여행도 할 수 없을 만큼 약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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