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8. 08:11ㆍ지식인/문학과 문화,인물
윈스턴 처칠이 서거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영어권 세계에서 윈스턴 처칠보다 더 많이 사 자화 되는 서구 정치인은 없습니다.
그 인물에 대한 수많은 논란에도 많은 젊은이들 중에 영웅으로 남아 잇고
중, 고등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손꼽는데 거침없이 윈스턴 처칠을 지목하기도 합니다.
세계 많은 사람들은 처칠이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이라고 지목 하지만 일부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극적으로 갈이며 재 평가되어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2차 세계 대전 중 암울했던 영국을 탁월한 리더십으로 독일 나치로부터 구했던 역사적으로나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한 포인트를 만든 인물입니다.
그로 인해 2002년, 처칠은 셰익스피어, 다윈, 브루넬 같은 사람을 제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그의 경력에 논쟁이 된 이슈는 무엇인지 알아봅니다.
처칠에 대한 많은 논란 중의 하나는 인간성입니다.
2007년 영국 국회 의사당에 서 있는 윈스턴 처칠 동상에 검은색으로 "인종차별주의자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붉은 페인트가 뿌려졌습니다.
영국에 남긴 그의 정치와 경력에는 영웅적인 발자취라는 기록이 있지만 서구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역사의 잘못된 편에서 영원히 비난받아야 할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백인 우월주의자이며 완고한 제국주의자로 그의 70년의 정치 경력에 부정적 검은 그림자로 남아있습니다.
그의 손자 니콜라스 솜스 경은 이와 같은 주장에 분노하며 이와 같은 논란은 "무식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욕적"이라고 비난하지만
여전히 처칠이 인종 차별적 신념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논쟁이 제안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은 정치적 반대입장의 인사들의 주장도 있었지만
Churchill: End of Glory의 저자인 John Charmley 도 처칠이 인종 위계와 우생학을 확실히 믿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한 처칠의 견해로는 백인 개신교인이 백인 가톨릭보다 상위에 있었고 인도인이 아프리카인보다 상위에 있었다고 기록하며 "처칠은 자신과 영국을 사회적 다윈주의적 위계질서에서 승자로 간주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타 민족에 대한 잔혹성
처칠은 1919년 영국에서 국방부 및 항공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주로 쿠르드족과 아프간인에 대한 화학무기 사용을 옹호한 것으로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처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나는 미개한 부족들에게 독가스를 사용하는 것을 강력히 찬성한다”라고 말한 것에 대한 강력한 비난을 했으며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이와 같은 논쟁은 잘못된 것으로 실제로 처칠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하겠다고 제안한 것은 강한 독가스가 아니라 최루 가스 일종의 누액 가스였다고 논쟁 가치를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지역에서 반군 부족을 진압하는 데 사용된 영국의 가스 공습을 비판하며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가스 사용에 대한 찬성 자체가 비난받을 일이라고 말합니다.
벵골 기근에 주범 처칠
1943년 인도는 당시 영국령에 있는 식민지 였습니다.
이때 인도 뱅골 동북부에 재앙적 기근으로 최소 3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처참한 과정에 윈스턴 처칠의 행동이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시 심각한 기근으로 뱅골지역 주민들에게 연료와 식료품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처칠은 전쟁물자를 위해 지역에서 나는 쌀을 모조리 공습해 전쟁을 위한 연료 공급으로 보냈고 해방된 유럽 민간인들을 먹이기 위해 굶주리는 인도인들을 무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뱅골 지역인들이 당장에 굶어 죽어가고 있었지만 유럽인들을 위해 밀을 비축해야 한다는 정책을 썼으며 호주 밀 170,000톤을 소비가 아니라 저장했다고 한 작가는 썼습니다.
심지어 처칠은 인도인들이 토끼처럼 번식함에 의해 기근이 발생하는 것처럼 지난과 원인 전가를 했으며
독일과의 전쟁에만 몰두하고 인도 뱅골 지역에 대한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뱅골 지역 쌀을 수급해 독일과의 전쟁 물자로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처칠을 옹호하는 자들은 당시 급박한 전쟁 중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진전을 보여주기는 어려울 때라고 주장하며 세계적인 전쟁 중에 항상 우선순위와 필수 요구사항은 언제나 상충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간디와 처칠의 저자" "아서 허먼" 은 처칠이 없었다면 기근이 더 심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처칠과 그의 내각은 전쟁을 위한 노력을 하면서도 모든 국민들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모색했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그를 비난하는 자들은 처칠은 전쟁 중이라 할지라도 우선순위 지정에서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처칠이 영국의 자원을 확장하고 영국을 승리로 이끈 건 사실이지만 영국령에 모두를 위해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노력은 부족했으며 이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에 대한 태도
2012년, 예루살렘에 처칠 센터 건립에 대한 제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처칠은 반 유대주의와 무관치 않다는 이유로 반대가 있었습니다.
처칠의 전기를 썼던 작가 마틴 길버트 경은 "그는 시온주의 이상을 잘 알고 있었고 유대 국가라는 개념을 지지했다"라고 반박했지만 Charmley는 처칠은 확실히 반유대주의자이고 의심할 여지없이 열렬한 시온주의자였다고 말합니다.
2007년, 1937년에 기록된 미공개 기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처칠의 것으로 추정되며 내용에는 유대인이 박해받는 것은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으며. "유대인은 고칠 수 없는 외계인"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이 기사가 정확히 처칠의 것이라는 정확성이 없다고 지적하며 기사에 진위여부에 논쟁을 붙였습니다.
이슬람에 대한 태도
처칠은 인도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서 종파적 균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제국 통치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947년에 자유를 얻기까지 유혈 사태로 수백만 명이 죽거나 난민이 되었습니다. 이 유혈 사태는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의 정치적 긴장으로 남아있습니다.
노조 경멸 주의
1910년 11월 웨일스 남부 마을에서 폭동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거의 1년 동안 지속된 파업으로 이어졌습니다.
파업 노동자들이 지역 경찰과 충돌하자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처칠은 군인을 파견했고 발포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처칠의 처리는 많은 논란이 되었고 그의 남은 생애 동안 그의 평판에 악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78년, 법으로 올라간 그의 반노조에 대한 재판은 그의 손자가 변호를 했으며 1910년의 사건에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재판에서 그의 옹호자들은 당시 실제로 폭력 사용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부인하는 메모를 보냈지만
역사학자인 Louise Miskell은 2014년 3월 BBC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에 대해 무엇인가 희생양을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처칠은 1911년 리버풀의 파업 관련에서 다시 군인들을 파견하여 병사들이 쏜 총에 2명이 사망하면서 처칠의 노조 경멸이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1919년에는 볼셰비키 반란과 시민 소요기간 동안 탱크와 10,000명의 군대를 배치하여 그의 노조 경멸은 정확해진 사건이 되었습니다.
갱단들이 죽기까지
1911년 1월 런던 이스트 엔드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3명의 경찰관을 살해한 갱단의 은신처를 200명의 경찰관이 포위하였으며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처칠은 소방관들에게 총격이 멈출 때까지 갱단이 숨어 있던 건물에 타는 불을 끄지 말라고 명령을 하였고 두 갱단은 긴 총격전으로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처칠의 비판론자들은 어찌 되었든 이 지시는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것에 비난을 했으며 처칠을 경솔함과 불안정성의 한 예라고 말했습니다..
영향력에 대한 정치자금
1923년 영국 의회는 정치자금이 불법이라는 규정은 없었으나 매우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정치적으로 침체기"였을때 석유회가 합병 문제를 해결해 주는 주건으로 5,000 파운드의 정치자금을 받았습니다.
당시 뇌물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이해상충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한 처사였습니다.
아일랜드에서의 역할
1919년 1월 처칠은 영국의 국방장이었습니다. 11일 후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처칠은 아일랜드에 과도한 폭력으로 행사한 것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처칠은 아일랜드의 가내 통치에 반대했고 처음부터 가혹한 탄압을 시행해 1921년 전쟁을 종식시킬 앵글로-아일랜드 조약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간디에 대한 진술
현재 인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간디입니다.
그는 인도의 자결권을 끝까지 옹호했던 사람이었으며 처칠은 그에 대해 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1년, 처칠은 인도의 반식민주의 적에 대해 "선동 했던 간디를 향해 "제국의 적이자 나쁜 놈은 죽여 제거해야 한다고." 하며 반나체로 부제 왕궁 계단을 걸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놀랍고 구역질 난다"라고 말했습니다.
간디는 평화주의자로 오랫동안 대영제국 처칠의 비전에 위협이 되었으며 인도에서 처칠은 극우 정치가이지만 1929년과 1939년 사이의 인도의 모든 정치 당원들은 인도에 대한 처칠의 견해에 매우 혐오스러워했습니다
처칠은 인도인들에게 자국의 통치권을 부여하는 것이 대영제국의 몰락과 문명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몹시 놀랐습니다
윈스턴 처칠의 생애
1874년 11월 30일 Oxfordshire의 Blenheim Palace에서 태어나
1900년 보수당 의원이 되었으나 1904년 자유당에 입당하였습니다.
1908년부터 내각의 일원이었고,
191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초기 해군 제1대장으로 복무했으며
1917-1929년 서부 전선에서 복무했습니다.
처칠은
인도 자치 의결권에 대한 반대,
나치의 부상에 대한 경고,
에드워드 8세에 대한 지지로 1930년대에 정치적으로 고립.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수상으로 임명되어 전시 지도자로 명성을 떨쳤으며.
1945년 선거에서 패배했으나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총리직을 회복
1965년 1월 24일 사망, 국장을 받음
한마디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고 합니다.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과 영국 국민들의 영원한 영웅으로 남아 있는 처칠은 암울했던 시대에 자국을 위해 용명 하고 지혜로운 리더십으로 정치적 안전과 안보적 평화를 지켰으며 자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었습니다
그가 썼던 1920년 기사에서 보면 "유대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려 깊은 사람은 그들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놀라운 인종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듯이
타인종에 대한 바른 이해와 존중, 그리고 타민족에 대한 인권을 생각했더라면 오늘날 논란 없는 영웅으로 추대받았을 것입니다.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처칠은 전쟁에서는 결의, 평화 속에서는 관대함'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싸움이 있다고 느낄 때 그는 매우 세게 밀어붙이곤 했고, 평화와 대화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할 때 그는 또한 그 최전선에 있었습니다."라고 합니다.
혼란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었지만 인도 뱅골 지역 기근에 대한 그의 대처와 방관, 그리고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의 인명에 대한 경시는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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