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1. 01:22ㆍ세상만사/사회
인간에게 인권이라는 글짜가 적용이 된지가 얼마나 되었을지 알아보고 싶어집니다.
누군가는 로얄페밀리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갈망이 있겠지만 인간이라는 한 생명체로 한 시기를 살아가는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불행하게 살다간 사람들,
왕위에 올랐지만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비명에 가야 했던 사람들,
원하지 않았던 일이지만 태어났다는 이유로 끌려가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
생각해 보면 아무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져 유기된채 사라져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인권도 없었고 최소한의 방어권도 없었습니다.
지구상에서 군주제가 폐지되고 민주주의가 널리 뿌리를 내린 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인것 같습니다.
오늘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비참하게 죽어야 했던 인물 5인을 알아 보았습니다
프랑스의 요한 1세(1316년 11월 15일 ~ 11월 20일) 5일 통치
1316년 11월 15일, 프랑스의 왕 루이 10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클레맹스 사이에서 요한1세가 태어났습니다.
프랑스 역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요한 1세가 파리에서 태어났을때 그는 유복자 였기에 그를"유복자왕 요한"(Jean le Posthume)이라고 불렀으며 태어나면서 아버지에 이어 왕 위를 계승받게 되었습니다.
태어난지 5일만에 죽어야 했던 요한 1세는 그 5일 동안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이었습니다. 그의 이복 누이 호아나 2세는 후에 나바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아기 왕 요한1세는 왕위를 장악하고 찬탈하려는 그의 삼촌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문과, 어느 죽은 유아와 교체되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인증된 바는 없습니다.
수 십년 후, 한 남자가 자신이 요한 1세라고 주장하며 나타났지만 신속하게 구금되어 나폴리에 투옥되었고 그곳에서 사망햇습니다.
조카를 죽인 삼촌 필리프 5세는 아기왕 John I가 왕위에 있던 5일간 섭정을 했으며 아기 왕이 죽은 후 곧 바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프랑스 역사기록에는 최 단기 통치자, 최연소 통치했던 프랑스의 군주로 기록하고 있고 어린 아기 요한은 생드니 대성당에 묻혔습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5세(1470 ~ 1483) 두달 통치
에드워드 5세는 장미전쟁이 격렬햇던1470년에 웨스터민스터 압베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이듬해인 1471년 네덜란드에 망명생활을 하던 아버지 에드워드 4세에 의해 웨일즈의 왕자로 간주되었고 어린 왕자는 아버지에 의해 왕자로서의 엄격한 교육적 양육을 받으며 종교적 활동과 함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상이였습니다.
정치적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브르타뉴 공작의 어린 딸 안과의 약혼도 햇으나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에드워드가 12세때인 1483년 4월 타락한 왕으로 낙인찍힌 아버지가 죽자 에드워드5세로 왕위에 등극하게 되고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에드워드의 보호자로 임명되었습니다.
보호자 없이 젊은 왕이 즉시 왕좌를 차지하고 자신이 섭정을 하기를 원했던 에드워드 어머니 우드빌과 보호령을 앞세운 왕실 의회와 갈등이 발생하면서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은 결국 에드워드 어머니 영향력 아래 있던 우드빌 지도부를 체포하고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남동생을 런던탑으로 끌고가 구금했습니다.
글로스터 공작은 급기야 에드워드5세와 그의 형제들이 우드빌의 불륜에 의해 태어난 것을 주장하며 왕과 그의 형제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의회는 결국 6월 26일 글로스터를 국왕으로 세우며 리처드 3세로 선포했습니다.
젊은 군주는 에드워드5세로 단 두 달을 통치햇으며 젊은 왕과 그의 동생의 실종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며 삼엄한 경비 속에 감금된 후 런던탑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잉글랜드 왕국의 법률가, 저술가, 사상가, 정치가인 토마스 모어경은 나중에 "젊은 왕과 그의 형제가 질식하여 죽었다"고 썼으며. 1674년 찰스 2세가 소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유해를 발견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했습니다.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2세 콤네노스(1169~1183) 격동속에 3년 통치
알렉시우스 2세 콤네누스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재위:1180년 – 1183년)이며. 마누일 1세 콤니노스와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의 아들로 1169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9세가 된 1180년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딸 아네스와 결혼햇고 같은해, 아버지 마누엘 1세가 죽자 어린 알렉시오스가 왕위에 올랐지만 어머니 마리아가 섭정을 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서방출신으로 이방인 취급을 받았지만 자문관을 친 서방적 인물인 프로토세바스토스(Prōtosebastos)를 기용하자 백성들은 마리아의 정부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커졌고 곳곳에서 음모와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혼란이 지속되면서 전 황제 마누엘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마누엘의 사촌인 안드로니쿠스 콤네노스는 그의 젊은 시절 치정에 유명세로 인해 백성들의 추앙과 지지를 받으며 1182년 8월 군사를 일으켜 수도로 진격합니다.
이때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폭동이 일어나 거의 모든 라틴인들이 학살을 당했고. 그의 진격하는 군사를 막으려는 군대도 없어 그는 쉽게 정권을 탈취할 수 잇었습니다.
이때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와 모후 마리아는 감금되었다가 마리아는 감옥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이듬해 9월 아드로니쿠스는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와 공동 황제에 올랐으나 불과 두 달 뒤 어린 알렉시오스를 살해하고 시신을 보스포루스 해협에 던졌고 어린 황제의 황후였던 12살의 아녜스를 자신의 황후로 맞이하며 단독 황제에 즉위합니다.
이 후, 안드로니코스는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단행하고 각종 폐단과 군사 귀족을 탄압하면서 그의 인기는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또 다시 소요와 반란이 잇따랐을때 안드로니코스는 더욱 심한 고문과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헝가리 왕 벨러 3세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마냐와 동맹을 맺고 동로마 제국을 침략하여 베오그라드, 니시, 사르디카 등을 유린하다 마누엘 황제의 종조카 이사키우스 콤네노스는 키프로스에서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조빙 황제(1272–1279) 7년 재위
징기스칸이 오기전, 송 빙제는 1272년 두종 황제와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나 송 황제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습니다.
조빙은 황제의 칭호를 받기 전인 1274년에 '신왕'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이후 '광왕'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몽골군에 의해 송나라 수도인 린안과 함께 공 황제가 함락되자 공황제의 형제인 네 살배기 자오빙과 자오시는 관리들의 도움으로 금화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곳에서 네 살배기 자오빙이 부총사령관으로 자오시는 총 사령관으로 지명이 되면서 1276년, 7세의 자오시가 송나라의 새로운 황제 단종이 됩니다.
몽골 바안 장군은 중국에 남아있는 송 왕조 구성원을 제거하기 위해 중국 남부에 대한 공격을 단행했고 이때 젊은 단종이 질병으로 인해 송 왕조 군대는 사기가 떨어지고 그 수가 줄어들기 시작햇습니다. 공황제의 어린 형제를 피신 시키던 관리들에 의해 어린 형제는 다시 한번 광저우로 도망을 쳤고 그 곳에서 자오빙이 황제로 지명이 됩니다.
1279년 몽골 수군에 의해 패배가 임박할때 자오빙 형제를 도와 도망하엿던 관료중 한 사람이 7세의 황제가 된 자오빙을절벽으로 데려가 안고 함께 깊은 바다로 뛰어들었고 송나라는 비극적 인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13일의 금요일에 무슨일이 일어날까요?
에드워드 6세(1537–1553) 6년 통치
16세기 영국은 역사상 가장 악명 높고 무자비한 군주 헨리 8세가 30년의 악랄한 통치를 마치고 1547년 죽습니다.
이후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때 그의 나이 고작 9세 였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영국 귀족회의가 왕의 일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이 그룹에는 왕의 삼촌인 에드워드 시모어가 노섬벌랜드 백작인 존 더들리에 의해 전복될 때까지 함께 있엇습니다.
이 시기는 영국은 개신교의 종교 개혁과 함께 종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 속에 쳐했고 설상가상 야망에 노섬벌랜드가 정군을 잡기 위해 그의 아들을 헨리 8세의 조카인 레이디 제인그레이와 급하게 경혼을 시켜 권력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통치자로서 왕의 위치는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왕좌에 있던 기간 중 에드워드 6세는 결핵을 앓고 있다가 15세때 결혼하지 않은 소년 왕은 사망합니다.
한마디
조선 왕조의 후손이 이글을 본다면 많은 비난과 힐책을 할 수 도 있겠지만 이땅에 군주제가 사라진것은 천만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혈족간의 피의 잔치로 얼룩진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백성들에게 남긴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신분제이며 기득권제, 그리고 가진자와 배운자들의 휭포뿐이였습니다.
성리학에서 유교로 넘어오면서 성별 차별과 여성들의 인권약탈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조의 권력과 편의를 위해 백성들의 피를 빨았고 그 언저리에 빌붙어 먹던 권력자들은 세도가라는 명분하에 백성들을 짋밟는데 가책이 없었습니다.
나타나는 형식은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그 행태는 사라지지 않고 기득권들의 휑포는 국민들의 삶을 짋밟고 있으며 그 고통을 매개로 살아가고 있는 권력과 대부들은 교묘하게 변장한 법의 태두리에서 여전히 백성들을 밟고 서서 군림하고 있습니다.
중세 이 후 까지의 내려오던 많은 군주제가 내,외세에 의해 폐지된것 처럼 오늘날 무늬만 민주주의 역시 변화되야 할 숙제는 아닐지, 우리 모두 심각한 고민은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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