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웠던 한국 역사가 또 한 페이지 넘어 갑니다.

2023. 5. 15. 18:42나그네의 미국생활/일상 생활속에 이모저모

폐허가 된 한국전쟁 후 국토

 

 

인생이란 무엇일까?

심도 깊은 질문 같지만 개인이 살아온 발자취를 돌아보면 그것이 바로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끝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같은 동포끼리 3년간의 물고 물리는 싸움으로 전 국토는 그야말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이란 직접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가며 그려질 것입니다. 

 

부모를 잃은 수많은 고아가 생겼고, 살아남은 가족도 흩어져 지금까지 생사를 모른 채 살아가야 하는 인생도 있습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도 당장 고픈 배를 채우기란 죽을 만큼 어려웠을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황폐화된 한반도 국토를 보며 "향후 100년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할 만큼 끔찍하게 무너져 버린 민초들의 삶의 터전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가족까지 흩어지게 했습니다. 우리의 자녀를 출근 시키는 날(Take Our Child to Work Day)

 

 

작은 목숨 큰 역사

 

혼자살던 100세의 한인 할머님이 한 많은 눈을 감았습니다.

한국의 전쟁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견뎌낸 할머님은 전쟁이 정전 선언이 되고 난 후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왔습니다. 당시 할머니에게는 부모도 있었고 형제도 있었지만 배를 채우는 것보다 우선할 수는 없었던지 부모형제를 뒤로 한채 미군을 따라 낯 선 곳으로 왔습니다. 

 

할머님 말에 의하면 자기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어린 미군을 따라온 미국은 먹을 것이 지천인지라 천국 같았다고 했습니다. 

닭 한 마리가 너무도 싸서 날마다 닭을 먹을 수 있었고 

직장에 사람이 없어서 일할 사람을 데려온 사람은 그때 돈으로 200불씩을 줄 정도로 돈 벌기 위해 일할 곳이 많아서 이곳이 천국 이는구나 하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화도 없고 글씨도 모르던 할머님은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와 연락이 닿지를 않았습니다. 

홀로 열심히 살았지만 어딘가는 허전한 상태로 낮선 미국에서  70년을 살아가면서 이곳이 고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한국에 한번도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할머님은 한국이 아직도 전쟁 직후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으며 부모형제와 한 번도 재회나 통화를 해 보지 않은 상태로 늙어 갔던 것입니다. 

지금은 기억 마저 희미해져 그리움마저 남아 있지 않다고 하는 말을 들으며 " 이 또한 대한민국 비극의 한 페이지"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미국에서 겪었던 학교 폭력에 대응했던 경험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

 

미국이란 나라는 기독교인들이 기초를 세운 국가인 만큼 그들의 기본적인 정신 속에 "선한 사마리아정신"이 있습니다. 

요즘 시대에,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늙고 병들면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할머님의 시누이는 자신도 나이가 많아 병들은 상태이지만 늙은 올케인 할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이 많은 할머님이 운전을 할 수가 없는 상태이고 보니 먹을 것을 구할 수도 없었고 

약간의 치매기운까지 겸한 상태이니 홀로 살 수가 없었을 것이고 정부에서 시설로 데려갔을 것입니다.

 

할머님의 어린 남편은 나이가 많은 할머님이 먼저 세상을 뜰 것이라 생각하고 모든 재산을 자신 이름으로 해 두었다가 본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녀가 없는 할머님은 모든 재산을 고스란히 넘겨 받았지만 돈을 쓸 줄을 몰랐습니다.

 

가난에 찌들은 삶을 탈출하기 위해 그동안 돈 버는 일에만 열중한 후 돌아본 인생에 남은 것은 돈 뿐이었답니다.

그럼에도 할머님이 유일하게 사용하는 돈은,  집 주변에 있는 야생동물들을 위해 그들의 식량을 사고 조석으로 그들을 불러들여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던 할머님께 정신건강에 약간의 이상이 생기면서 시누이가 자신도 늙었으면서도 자신의 집으로 할머니를 데려간 것입니다.은퇴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저렴한 국가들

 

 

돈 쓰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할머님은 빨리 죽고 싶어 했습니다. 

가끔씩 할머님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안부를 물을 때면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 했습니다.

노인이 답답해서 그러겠거니 하고 차에 태워 쇼핑센터에도 가고 점심도 먹고  하며 시간을 보내면서 조심스럽게 권면을 해 봅니다. 

 

함께 사는 시누이를 위해 생활비를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생활비도 받지 않고  홀로 있는 올케를 데려간 시누이를 위해 가끔씩이라도 선물 같은 것을 주는 것은 어떻냐고 ,,,,

가지고 있는 돈으로 시누이 용돈이라도 좀 주라고,,,

 

그러나 100살 노년에도 돈을 쓰면 안 된다는 사고만 고집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마저 들었습니다. 

 

유색인이자 조카도 오빠도 없는 늙은 올케를 함께 살며 돌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도 기꺼이 모셔와 함께 기거하는 것을 보며 지켜보는 입장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시누이한테도 나눔이 없이 움켜쥔 돈 주먹은 펴지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한국전쟁을 겪고 전쟁직후 배고픔에 못 견뎌 부모 형제와 영원한 생 이별을 마다 하지 않을 만큼 절실했을 것이 돈이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도 돈을 쌓아두고 있음으로 배 부름을 느꼈을 것이고 인생에 만족을 느꼈을 것입니다.

본인이 쓰지 않아도 곡간에 돈이 있다는 것만으로 풍족함을 느끼며 평안하게 눈을 감았을 것입니다.   

부디 천국에서 잊었던 부모 형제 다시 만나 그동안 못 나누었던 정 새롭게 이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슬프고 어두웠던 한국사의 또 한 페이지가 힘겨웠던 어느 할머님의 움켜쥔 주먹에서 역사라는 이름으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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